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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 2026.09.26 최근 유튜브를 통해 제기된 박진영 씨의 삼위일체 비판을 개혁주의 정통 신학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검토한다.
삼위일체

박진영의 삼위일체 부정, 개혁주의 신학은 어떻게 반박하는가
신학적 범주, 교리사적 발전, 원전 독해 — 세 층위에서 드러난 논증의 허점

박진영 씨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고 테르툴리아누스의 원래 입장과 이후 교리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성부·성자·성령을 "뜻과 목적이 같은 세 존재"로 재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그 결론은 초대교회가 이미 정죄한 이단적 명제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진단이다.

최근 박진영 씨가 유튜브를 통해 제기한 삼위일체 비판이 한국 교회 안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에 없다는 점, 테르툴리아누스가 원래 의도했던 삼위일체와 이후 발전된 교리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성부·성자·성령을 "뜻과 목적이 같은 세 존재"로 재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신학적으로 검증했을 때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나는 주장이며, 그 결론은 초대교회가 이미 정죄한 이단적 명제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 이 글은 그의 주장을 개혁주의 정통 신학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검토하고자 한다.

범주 착각 — "혼"과 "몸" 개념의 오용

박진영 씨 논증의 근본적 결함은 인간론에서 쓰이는 "혼(魂)"이라는 범주를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한다는 데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고 말할 뿐, 결코 "하나님은 혼이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혼"은 연약하고 가변적인 피조물의 생명 원리를 가리키는 용어이지, 불변하시고 단순하신(simplex)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다. 성부와 성자를 "혼이 둘이므로 두 인격"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는 삼위일체를 세 명의 별개 존재로 만드는 삼신론(tritheism)의 논리 구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같은 오류가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를 "몸이 하나라는 뜻인데 신성에는 몸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데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이 한자어는 헬라어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세이스(μία οὐσία, τρεῖς ὑποστάσεις)" — 즉 "하나의 본질(essence), 세 위격(persons)" — 을 번역한 것이지, "몸"을 지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신학 용어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합의이며, 그 합의 배후의 실질적 내용(호모우시오스, 즉 동일본질)을 검토하지 않고 표면적 어휘만 문제 삼는 것은 정당한 신학적 반박이 될 수 없다.

영원출생과 성육신의 혼동

박진영 씨는 "예수님의 혼이 아버지 안에 있다가 태초에 아버지 밖으로 나오면서 몸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학사에서 오랫동안 구별해 온 두 교리 — 영원출생(eternal generation)과 성육신(incarnation) — 을 뒤섞은 것이다.

영원출생은 성자께서 영원 전부터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교리로, 여기에는 "이전"이나 "이후"라는 시간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를 부정하고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아리우스가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정죄받은 이유다. 성육신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던 성자께서 시간 안에서 인간의 몸을 취하신 사건(요 1:14)이지, 성자의 혼이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온" 사건이 아니다. 두 교리를 뒤섞으면 성자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특정 시점에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생겨난" 존재가 되어버리며, 이는 사실상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재판(再版)이다.

경륜적 종속과 본질적 종속의 혼동

박진영 씨는 예수님이 "인간에게 전해야 할 것만 아신다"는 표현을 근거로 성자를 성부보다 지식과 위격에서 열등한 존재로 그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때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신 것(막 13:32)은 성자의 본질이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신의 전지성 일부를 감추신 것 — 즉 경륜적 종속(economic subordination)에 해당한다. 이를 성부와 성자 사이의 본질적 위계로 오해하는 순간, 이는 성자를 성부보다 열등한 신성으로 격하시키는 아리우스적 종속론과 정확히 같은 구조를 갖게 된다. 개혁 신학이 본질에서의 완전한 동등성(consubstantiality)과 경륜에서의 질서(order)를 엄격히 구분해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상실"이 아니라 "감추심"이다.

— 칼뱅, 그리스도의 자기 낮추심에 대해

성령의 위격성 부인

박진영 씨는 성령을 "성부의 능력 일부"로, 위격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며 "성부가 계신 곳에 성령이 계실 수 없다"는 식의 배타적 논리를 편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성경 본문과 충돌한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마 3:16-17)에서 성부의 음성, 성령의 임재, 성자의 세례받으심이 동시에 나타나며, 세례 명령(마 28:19)에서도 성부·성자·성령이 나란히 등장한다. 또한 예수님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ἄλλος παράκλητος)"로 부르실 때(요 14:16), 헬라어 "알로스"는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이"를 뜻하며, 이는 성령이 성자와 동일한 위격적 실체이지 성부의 비인격적 능력이 아님을 명시한다. 초대교회의 "성령 대적론자(Pneumatomachi)"들이 정죄받은 것도 바로 이 논리 때문이었으며, 박진영 씨의 성령론은 이 이단적 흐름을 사실상 반복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 오독

박진영 씨는 "원조 삼위일체", 곧 테르툴리아누스의 입장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테르툴리아누스 본인의 텍스트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의 『프락세아스 반박문』을 보면 그는 이미 "하나의 통일성이 삼위로 질서 있게 나타나며, 세 위격은 본질과 능력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수브스탄티아(substantia, 본질)'라는 핵심 개념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으며, 박진영 씨는 이 개념을 삭제한 채 테르툴리아누스를 인용한 셈이다. 나아가 설령 그의 주장이 테르툴리아누스와 완전히 일치한다 하더라도, 삼위일체 교리는 2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니케아(325년)와 콘스탄티노플(381년) 공의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정교화된 것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발전의 초기 단계에 서 있는 인물이지 최종 정식화가 아니다.

신학방법론과 목회적 함의

이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교리(doctrine)와 교의(dogma)를 구분하지 못한 공통된 방법론적 결함이 있다. 교리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 자체로서 불변하지만, 교의는 그 교리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설명으로서 시대를 거쳐 더 정교해질 수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이르는 과정은 "없던 교리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언어로 정교하게 다듬어 간 과정이었다.

삼위일체론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근간이다. 세례, 예배, 기도, 축도(고후 13:13) 모든 것이 삼위일체적 구조 위에 서 있다. 성령의 위격성을 부정하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 자체가 근거를 잃으며, 성자의 영원성과 완전한 신성을 흐리면 대속의 효력과 구원의 확실성 자체가 흔들린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삼위일체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지성을 잃을 위험이 있지만, 이를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구원 자체를 잃을 위험을 안고 있다.

박진영 씨의 논증은 지적 열정과 방대한 자료 수집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범주(혼/영), 교리사적 발전 과정(영원출생/성육신, 경륜적/본질적 종속), 원전 독해(테르툴리아누스)라는 세 층위에서 모두 오류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 오류들이 도달하는 결론들 — 성자의 존재 시작점 설정, 성령의 위격 부인, 성부·성자·성령의 동시 공존 부정 — 은 우연히도 아리우스주의, 성령 대적론, 여호와의 증인식 종속론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개혁주의는 이 문제에 이단 판정을 서둘러 내리기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세워온 정통 문법으로 돌아가 성경 전체의 증언과 대조하며 신중히 분별할 것을 요청한다.

본 기사는 개혁주의 신학(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관점에서 최근 박진영의 주장을 비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