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해석
같은 자리에서도 해석은 180° 갈립니다. 해석은 말씀을 들은 우리의 몫이며, 중요한 것은 무리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 장로님이 올리신 아래 글에 '복된 해석'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지금 어둠은 동터올 새벽의 사인입니다. 지금 내리막은 곧 나타날 오르막의 사인입니다. 지금 고난은 다가올 축복의 사인입니다 — 한 장로님이 올리신 글
한 자리, 180° 다른 해석
오늘 새벽 말씀은 삿 13:15~25입니다. 태어날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런데 아내는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한자리에서 상황에 대한 해석이 180° 다릅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온 집사님
몇 년 전 부자들이 많은 시내 교회에 다니시던 여집사님이 등록을 하셨는데, 우연히 목사님과 같이 심방을 갔습니다. 미리내아파트에 사시는 40대 중반쯤이었습니다. 남편은 증권회사에 다니다가 침체가 길어지면서 실직을 했습니다. 그 가정의 내리막이었습니다. 하루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오전예배에 참석하셨는데, 그날따라 공교롭게도 목사님 설교가 '예배에 참석하는 자의 옷차림'이었습니다.
앉아 있는 수백 명 성도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지, 바닥까지 끌리는 롱드레스를 입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목사님은 그냥 전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들어올 때 그 집사님을 본 저는 예배 시간 내내 말씀이 걸림이 되지 않을까 불안했습니다. 복된 해석은 '이전 교회에서는 미니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여기는 아무래도 변두리니까 다음부터는 옷차림에 신경을 좀 더 써야 되겠구나'라면 좋았을 텐데, 그날 이후 집사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해석은 우리의 몫
하나님의 사자는 말씀을 하고 떠났습니다. 해석은 남아 있는 마노아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가정의 달 설교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이런 형편, 저런 사정을 생각하면 하실 말씀이 없답니다. 해석은 우리의 몫입니다.
딱딱한 음식을 내놓아도 소화시키면 건강한데, 조금만 거친 음식이 나와도 설사를 한다면 일 년 52주 부드럽고 먹기 좋은 죽을 내놓아야 합니다. 죽을 먹고 힘이 날 리가 없습니다.
무리 속에 남아 있어야
소화를 하든 설사를 하든 중요한 건 무리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떨어져 있으면 위험합니다. 사사인 삼손도 공동체를 떠나 남쪽의 가사로 내려갔습니다. 전도하러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여집사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