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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2026.10.18 송월야 칼럼
선대(善待)

받고 싶은 대로, 계산 없이 — 선대(善待)의 신앙

황금률은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서 시작된다.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원수에게까지 베푸는 선대는,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하신 아버지를 닮는 일이다.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 욕심 부리지 마라." 유치원에서도 배우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몇 사람이 모인 자리의 예절 정도가 아니다. 율법과 성경 전체를 모아 가장 귀한 한 줄을 꼽으라면 교회가 '황금률'이라 불러 온 바로 그 말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절)이다. 본문의 '선대'는 '선'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도스와 '행하다'를 뜻하는 포이에오가 합쳐진 말로, 선으로 대하고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누구를, 어떻게, 그리고 왜 선대해야 하는가. 2026년 10월 18일 대구 참좋은교회 주일예배에서 이윤찬 목사가 전한 설교를 따라 그 길을 짚어 본다.

받고 싶은 대로 — 선대는 '나부터'다

우리는 흔히 주고받기로 관계를 맺는다. 그 사람이 연락했으니 나도 한 번 연락하고, 찾아왔으니 나도 찾아가고, 잘해 줬으니 잘해 주고 못 해 줬으니 못 해 준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 범위에 머물지 않는다.

요즘 방송에서 말하는 '거울 치료'가 있다. 거울 앞에서 욕을 하면 거울도 똑같이 욕하고, 웃어 주면 똑같이 웃어 준다. 편의점에서 손님이 반말을 하자 직원도 반말로 맞받고, 결국 "너 몇 살이냐"는 싸움으로 번진다는 우스개 영상도 같은 이치다. 거꾸로 생각하면, 내가 선한 말을 하면 선한 말이 돌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도 싫어한다.

이 목사는 성도들이 식당에서 보이는 모습을 예로 들었다. 식사 전에 기도부터 하니 종업원들은 이들이 교회에서 온 사람인 줄 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어이, 야" 하고 반말로 하대한다면 어떻겠는가. 돈을 낸다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도 우리의 누이요, 누군가의 어머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수준이 저 정도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오히려 "오늘 수고 많으십니다" 하고 작은 정성이라도 건넨다면, 따로 부르지 않아도 반찬이 채워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황금률은 상대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지 않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랬다"가 아니라,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선대하면 선대가 돌아오고, 내가 악담하면 악담이 돌아온다. 사랑은 받고 싶은데 사랑하기는 싫고, 하나님께는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면서 남은 용서하지 못하고, 친절을 바라면서 자신은 친절하지 않은 마음 — 이 목사는 이를 두고 '도둑놈 심보'라고 꼬집었다.

이미 대접받은 사람이기에

그렇다면 선대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미 대접받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은혜를 받았기에 선대가 가능하다. 자격 요건을 따졌다면 우리는 탈락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아직 죄인이며, 아직 원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 내가 대단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 너무 크고 많아서 베푸는 것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중요하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 비난하고 욕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해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인사하고, 뛰어오는 사람을 위해 '닫힘' 대신 '열림'을 누르고, 인사하지 않는 아이에게 어른이 먼저 "안녕" 하고 건네는 일. 그렇게 먼저 대접받은 아이들도 자라면서 선대와 먼저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계산을 버리고 — 죄인들도 하는 사랑을 넘어서

첫 번째가 '받고 싶은 대로'였다면, 두 번째는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다. 주님은 32절부터 34절까지 거듭 죄인과 우리를 비교하신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는 것, 받기를 바라고 꾸어 주는 것은 죄인들도 다 한다. 강도도 제 자식은 사랑하고, 불량배들도 모이면 서로 '형님' 하며 아낀다. 우리 가족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다 싫어한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선대다.

이 목사가 소개한 오래된 일화가 있다. 비 오는 밤, 묵을 곳을 찾지 못한 노부부가 한 호텔에 들어섰지만 방이 없었다. 젊은 직원은 비에 젖은 노부부를 보고 누추하지만 자기 방에서라도 주무시겠느냐고 권했다. 얼마 뒤 뉴욕으로 와 달라는 편지가 왔고, 찾아간 곳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었다. 노부부는 그 호텔의 주인이었고, 청년은 총지배인으로 발탁되었다. 상대가 호텔 주인인 줄 알았다면 누구라도 극진히 대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길 지나가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이름도 모른 채 건넨 도움

이 목사는 자신의 경험도 나눴다. 단기 선교를 마치고 새벽에 인천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지갑과 항공권, 여권을 모두 잃어버리고 안절부절못하던 한 외국인 영어 강사를 만났다. 안내 데스크에는 직원도 없고 전화도 닿지 않던 상황에서, 그는 교회 자매 한 명과 함께 그를 데리고 버스 종점 주차장까지 찾아갔다. 청소 중이던 그 버스에 올라가 보니 잃어버린 물건이 좌석에 떨어져 있었다. 비행기 시간이 급했던 그는 인사만 하고 떠났고, 다시 볼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한국에서 가장 난처했던 순간과 가장 좋은 기억은 같은 날이었을 것이고, 싱가포르로 돌아가 한국과 예수 믿는 사람을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외국에서 열차를 탔을 때는 캐리어를 통째로 도둑맞은 한국인 신혼부부를 만났다. 여권도 사진이 담긴 카메라도 모두 그 안에 있었다. 당장 돈이 없다는 말에 그는 200~300달러가량을 건넸고, 필요하다는 휴대전화 충전기도 내주었다. 계좌번호만 적어 주었을 뿐 이름도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았다. 며칠 뒤 그 돈은 통장으로 돌아왔다. 돌려받지 못했어도 상관없었다. 어려울 때 선뜻 도움을 받아 본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같은 일을 당할 때 자신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전도서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고 말한다. 강물에 던진 떡은 떠내려가 강가의 가난한 누군가가 먹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채워 주신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계산하지 않으셨다. 계산하셨다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실 이유가 없었다. 우리의 사랑도 죄인들이 하는 사랑의 범위를 넘어 넓어져야 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 누가복음 6:35

원수의 범위를 어디까지 둘 수 있을까. 1억 원을 떼어 가거나 칼로 찌른 정도는 되어야 원수라 하고, 험담 정도는 '조금 원수'라 해 두자. 그 조금 원수에게라도 사랑하고 선대하며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는 말씀에 선뜻 "아멘"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면 상이 '있다'가 아니라 '클 것'이라고,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아버지를 닮아 —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로

이 약속은 선대하면 아들이 된다는 조건이 아니다. 아들이 되었다면 선대해야 한다는 정체성의 선언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 아버지의 자비를 닮아야 한다.

이 목사는 스스로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 "저건 내 목소린데" 하고 놀랐다고 했다. 자식 안에는 아버지의 DNA가 들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남의 길흉사마다 찾아가 궂은일을 도맡던 아버지에게 "남들한테 하는 거 반만 나한테 하이소" 하곤 했고, 그의 아내도 예전에는 "교인들한테 하는 거 반만 나한테 하라"고 했다며 웃었다.

아버지의 자비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와 악한 자에게까지 미친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신 사람을 내가 무엇이라고 미워하고 비난하겠는가.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람을 내가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자리에서 자비를 베풀 때, 사람들은 "저 사람 진짜 예수 믿는 사람 맞네" 하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와 비를 고루 주신다. 그분이 지으신 인생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우리가 할 일은 그를 선대하는 것이다. 길 가던 나그네를 대접한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었고, 히브리서는 이를 두고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말한다(13:2). 알았다면 누구나 대접했을 것이다. 모르고 대접했는데 알고 보니 천사였다.

계산서 대신 은혜를

요즘은 축의금도 계산한다. 십 년 전 우리 집 잔치에 얼마를 냈는지 따지고, 식사를 하면 얼마, 부부가 함께 먹으면 얼마 하는 식의 기준까지 나돈다. 그러나 똑같이 갚는 것이 아니라 먼저 대접하는 것,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더 베풀고 나눌까를 고민하는 것이 선대다. 이 목사는 그때 그 일들이 돌고 돌아 자신이 이미 수십 배, 수백 배의 복으로 받았다고 고백했다.

  1. 받고 싶은 대로 — 상대가 아니라 나부터 시작하는 선대
  2. 계산을 버리고 — 돌려받을 것을 바라지 않는 선대
  3. 아버지를 닮아 —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하신 아버지의 자녀다운 선대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평생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라도 대접할 수 있을 만큼 받은 은혜가 내 안에 가득하다면, 선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 선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큰 상급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하기를 소망한다.

이 칼럼은 2026년 10월 18일 대구 참좋은교회 주일예배에서 이윤찬 목사가 누가복음 6장 31~36절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 「받고 싶은 대로 선대하라」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성경 인용은 개역개정판을 따랐습니다.